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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이동시키기, 교묘히 빠져나가기, 흐릿하게 만들기,

그리고 속도를 늦추며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마티에르를 관찰하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그 무질서 속에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1]

 

김대환 개인전 《예언대회상 Prediction vs Recollection》

2024.10.11-10.29 (TOGETHER)(TOGETHER)

 

안소연

 

 

1.

나탈리 레제(Nathalie Léger)의 소설 『전시(L’Exposition)』(2008/한국어판2024)는,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계속 이어지는 긴 문장으로 시작한다. “스스로를 방기하기,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기,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 아무것도 분간하지 않기, 흩트리지도 않기, 뚫어지게 바라보지 않기,”를 생략하고, 나는 그 뒤로 이어지는 나머지 말들을 따로 옮겨 이 글의 제목에 가져와 본다. 그러고 나서 이 제목으로부터 시작하는 글을 다시 잇는다.

   작가이면서 전시기획자이자 아키비스트인 레제가 쓴 소설은, 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진부한 시선에 대하여 적다가, 어떤 라디오의 목소리, 어떤 사진 한 장, 어떤 전위예술가의 행위, 어떤 찢겨진 종이 구멍에 대한 문장들로 잠시 우회한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의 종이 소리들을 지나, 그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집으로, 유령 같은 사람들의 문장을 덧붙여 놓은 수집된 자료들로, 도서관 사서의 호의와 중얼거림으로 이어지면서, 소설의 문장들은 두껍게 먼지 덮인 문서에 관한 회상과 베일로 덮인 공간을 가로지를 때의 기대를 뒤섞어, 과거와 미래 시제를 유예하며 무효화 한다.

   그렇다면, 레제가 다짐하듯 써 내려간 소설의 첫 문단은 저 무질서한 회상과 기대의 문장들에 어떤 책임을 부여할까? 그는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Jean Renoir)의 목소리를 인용한다. “그 주제는 날 완전히 잡아먹었지요! 훌륭한 주제는 언제나 자신을 불쑥 덮칩니다. 그것이 당신을 끌고 가는 거예요.” 레제는, 라디오에 출연한 르누아르의 예기치 않은 목소리에 사로잡힌 화자를 이끌어내,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서 알아보는”, 이 “노출의 시간(le temps de pose)”, “스스로에 관해 하도 생각한 나머지 완벽히 스스로를 잊게 되는”, 수수께끼의 순간을 묘사했다. 이 글의 제목으로 가져다 놓은 문장, “이동시키기, 교묘히 빠져나가기, 흐릿하게 만들기, 그리고 속도를 늦추며 모습을 드러내는 단 하나의 마티에르를 관찰하기,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그 무질서 속에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는, 불쑥 던져진 주제에 잡아 먹혀, 저 노출의 시간을 향해, 회상과 기대의 클리셰를 뚫고 지나가려는, (전시 기획자/아키비스트/소설가) 스스로의 유예를 다짐한다.

 

2.

김대환의 전시 《예언대회상(Prediction vs Recollection)》(2024)은, 그것을 겹겹이 둘러싼 (명료한) 허상들을 하나씩 걷고 보면, “전시”라는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서 빙그르르 맴돈다. “예언”과 “회상”을 띄어쓰기 조차 없이 불친절하게 맞붙여 놓은 이 전시는, 여러 장면들이 종이 위 글자들로 태연하게 배열되어 있는 레제의 소설처럼, 수수께끼 같지만 흰 색 종이 한쪽 모서리에서 또 다른 모서리까지 꽉 채워 적은 「전시글」(2024)의 야무진 편집 기술 덕에, 비약적인 상상의 이미지를 번개처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때쯤, “종이들 위로 헛되이 몸을 굽히”고 나서 “우리가 찾는 건 아주, 아주 작은 것”이라는, “노출의 시간”과 결속되어 있다는 것을 추리해 볼 수 있었다.[2]

   「전시글」은 “예언”이라는 단어를 꼭지점 삼아 써 내려간, 말[단어]과 상상[이미지]의 릴레이 경주 같다. 김대환은 어떤 다짐을 한다. 무엇을 할 것이고, 어떤 척을 하며, 어떻게 답하고, 어떤 것을 기약할 것인지, 스스로의 유예와 질서를 가늠해 본다. 하지만 그 다짐을 채우는 말들은, 하나같이 클리셰처럼 “닮은” 것과 “다른” 것에 기댄 예언자의 불안을 되비춘다. 그는 결국 딩뱃기호들로 단락의 적당한 경계선을 긋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회상”하는 것으로, 전시의 시공간을 (있었던 일처럼) 펼쳐낸다. 실제 사건에 대한 기억까지 확실한 볼드체로 길게 인용한 김대환의 「전시글」에는, 우습게도 회상의 문장들 속에서 결말을 예측할 수 없었던 기대들이 넘쳐난다. 무엇이 예언이고, 무엇이 회상인가, 이 둘 사이의 기울기가 (읽기의) 속도를 지연시킬 뿐이다.

 

3.

구르는 금속음, <땅데구르르르>(2012)는 인용된 과거 기억으로부터 자리한다. “학창 시절 사물연구라는 수업이 있었고, 학기 내내 방울 몇 알을 들고 다녔었습니다. 대체로 반짝이고 소리가 나는 이것과 친해지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었는데, 땅데구르르(video, 3’29’’, 2021)는 그 중 하나입니다.” 뒤로 이어지는 문장은, 강의실 바닥에 설치해 놓은 방울 작업이 누군가에 의해 깨끗하게 청소되었던 예기치 못한 사건을 설명해준다. “빈 바닥 밖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결국 그 중대한 사건 이후 “방울이라 부를 만한 바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그는, 과거에 이미 폐기된, 방울이 모티프가 되었던 시‧공간에 (다시) 자기를 드러낸다.

   방울은 중요한 단서다. 하나는 사라진 원형과 그것에 대한 기억 및 회상이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형체와 소리마저 흐릿해진 사물이 물질의 차원으로 압축된 상태에서 어떤 착시와 암시에 관여한다는 점에서다. 어두운 길바닥에서 방울을 망치로 치면서 납작하게 만드는 영상 <땅데구르르르>는 별다른 사건의 서사를 담고 있지 않지만, 작고 둥근 방울이 돌 바닥과 금속 망치의 강력한 마찰로 점점 납작하게 압축되어 가면서, 더이상 구르지 않고 바닥에 밀착되었다가 제 가벼움에 들썩거리는 움직임과 그때의 달그락거리는 금속음을 낼 뿐이다. 그 변화/변형이 땅 위의 질서를 구축하거나 해체하면서, 그로 하여금 “보기 좋은” 이미지를 찾게 한다. 그것이 나타나는 방식대로, 그 무질서 속에서, 심지어 그 질서 속에서.

 

4.

“방울이라 부를 만한 바닥”, 빈 바닥에 다른 형상을 노출하기 위해 그는 “시각적인” 또 다른 바닥이 필요했다. 오래 전, 타인에 의해 한 차례 실패[3]를 경험한 이후, 그는 망치로 두드린 (형태 소멸 직전의) 방울처럼, (공기가 빠져나가) 표면에 거칠고 생경한 질감을 가진, 어떤 시각적 테두리가 필요했을 테다. 한때 그의 주머니와 손바닥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그 방울은, 곡선의 윤곽과 스스로 일으키는 내부 파동에 의한 마찰음 탓에, 형체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소리와 움직임의 출현에 가깝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내가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일인데, 그는 일련의 사건을 조각적 상황으로 노출해 보려는 모양이다. 회상과 예언을 넘나드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매칭이라면, 적어도 내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전개다.

   전시장 바닥에 난파된 뗏목처럼 펼쳐 있는 흰 색 나무 판자들은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Bell’s False floor)’이라는 제목으로 서로 느슨하게 묶여 있다. 바닥을 자처하는 판자들은 제각각 크기와 기울기도 다르고 모서리 생김새마저 다르다. 그 안에 열 네 개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보류 중이거나 어떤 흔적 같은 것들이 흐릿하게 모양을 내고 있다. 그것 때문이다. 그 흐릿한 모양들이 바닥의 기울기에 관여하고 있었다. 웅덩이처럼 군데군데 움푹 파인 곳에는 파편적인 사물과 물질이 교차하며 중첩되어 있는데, 이 사태가 바닥(면)의 삼차원적 질서를 위태롭게 한다.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을 이루는 열 네 개의 개별적인 요소들은 수수께끼 같이 은폐를 기호화 한다. <의 엄지>(2024), <의 아파렌시스A>(2024), <의 아파렌시스의 친구>(2024)를 지나, <의 아파렌시스B>(2024), <의 쪽지 하나>(2024), <의 쪽지 둘>(2024), 그리고 <의 던지는 손 셋과 친구의 귀>(2024)로 미끄러지듯 연쇄되는 일련의 개별 제목들은, “소유자”를 빈 칸의 묵음으로 한 채 명확하지 않은 분절된 기호들을 엮는다. 이 소유의 관계에서 비롯된 존재의 (미)출현과 그것을 관찰하는 상상적인 행위야말로 《예언대회상》 전시가 미리 구상한 각본일 텐데, 그런 의미에서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이라는 표제는 애초에 ‘방울이라 부를 만한 바닥’이 함의하는 닮음과 다름의 인지적 모순을 나타낸다.

   이때, 김대환은 조각적 상황의 은유로 인지적 모순을 함의하는 소유의 관계를 풀어낸다. 그는 이미 과거의 여러 전시에서 비슷한 정황을 내비쳐왔다. 이를테면, 2023년의 개인전 《쉬운 길》에는 자신의 반려견 “양말”이 언급된다. 전시에 대한 글에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 보이는 것들만큼 좋아”한다며, “쉬운 길”의 시각적 수수께끼를 암시했다. 여기서도 그는 길이 환기시키는 임의의 바닥을 제작해 지면으로부터 높이를 한단 쌓아 올리면서 전시 공간의 바닥면을 또 다른 두께와 기울기로 덮었다. 이런 식의 공간 변형은 첫 개인전 《양말이피티(Yang-Mal-E-P-T)》(2018)에서도 전시라는 노출 환경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조건처럼 다뤄졌다. 그가 쓴 전시장 안내글에는 무언가를 예언하듯, “이미 밟은, 미세하게 푹신한 바닥을 따라 오르는 낮은 (무릎)언덕을 앞에 두고 동선을 고민한다. 언덕을 두고, 통로를 두고, 반대 편에 속하는 작은 구역을 두고, 고민하는 것이다. 통로라는 마련된 순차를 따를 것인지, 먼저 눈에 들어온, 바닥-발을 이미 들인 회색을 이어 밟아 갈지 고민하는 것이다. 언덕을 먼저 오르기로 한다.”고 써있다.

   그는 이 노출의 순간에 직면할 어떤 신체에 대해 상상한다. 자신의 과거[회상]와 타인의 미래[예언] 사이에 시‧공간적 통로를 만드는 일, 그는 그것을 (일종의 무대같은) 바닥이라 말한다. 이 통로 위에 모습을 드러낸/드러낼 형상들에 대하여, 그는 “보기 좋은”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마치 천지 창조의 마지막 날, 자신의 형상대로 한 사람을 만들어 동산에 두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 창세기의 기록을 떠올려 준다. 김대환은 “보기 좋은 형태”라는 말을 나와의 대화에서 종종 언급했다. 보기에 좋은 형태, 우리의 대화 속에서, 나는 그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시각적 함의라 생각했다. “방울이라 부를 만한 바닥”처럼, 닮음과 다름의 이중성을 소유하는 관계 말이다.

 

5.

다시, 난파된 뗏목처럼 흰색 나무 판자들이 펼쳐있는 전시장 바닥이다. 크고 작은 웅덩이처럼 파인 구역은 실과 방울로 바닥 표면과 흐릿하게 연결되어 있고, 바닥에 발자국처럼 찍힌 둥근 윤곽은 기이하게도 웅덩이와 방울을 오가며 이중적인 대구를 이룬다. 비약적인 암시에 엮여 또 다시 상상해 보자면, 납작하게 압축된 금속 방울은 흙으로 돌아가기 직전의 소멸하는 육체 같다. 일련의 정황에 사로잡힌 지각과 감각의 일들을 추려보면,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 시리즈는 사실상 “몰드”를 내포하고 있다. 움푹 파인 구역들의 희미한 연쇄는, 도면 상의 분류에서 ‘3-하’에 이르면, 흰색 나무 판자에 귀속되어 있지 않은 <의 던지는 손 셋과 친구의 귀>가 독립된 몰드라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4]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 개별 요소들이 (은폐된) 소유 관계를 제목에서 환기시키는 것처럼, 몰드는 그것을 은유하는 형식에 가깝다. 누구의 것인지 밝혀 있지 않은 저 모호한 소유 관계는, 원형의 흔적만 (네거티브로) 기억하고 있는 주형[mold]의 개념과 닮았다. 게다가 바닥 표면에 발자국처럼 찍힌 둥근 윤곽들 또한 일종의 원형-주형-주물의 복잡한 관계를 암시함으로써, 스스로 주형과 유사한 지위를 갖는다.

   수수께끼처럼, 맥락을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흰색 바닥면 위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사람 모양을 보자. 납작하게 압축된 방울과 나란히 놓인 웅크린 사람은, (500원짜리 동전 같은 방울 탓에) 스케일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 형상은, 앞선 개인전 《쉬운 길》에서 이미 등장했던, 정확히 말하면, 좌우가 뒤바뀐 채로 똑같이 복제된, (같지만 다른) 바로 “그” 사람 모양이다. 그 전시에서는, 심지어 원형의 흔적을 지닌 몰드를 흰벽에 걸어 놓고, 두께와 기울기를 지닌 숱한 (거짓) 바닥면들 위에 웅크린 사람 모양의 주물(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내밀한 몰드를 함의하고 있었는데, 더 앞선 전시 《양말이피티》에서 시작한 소유의 관계로서, “김대환”과 김대환의 강아지 “양말”을 한 팀으로 설정해 “양말2pt”의 스케일을 조정함으로써, 바닥, 더 나아가 (우리가 걷는/걸을) 공간의 동선을 “보기 좋게” 시각화 하고자 했다. 이때, 스케일의 조정이 소유 관계의 위상과 시차를 암시하면서, 조각적 상황, 즉 주형과 주물의 관계를 끊임없이 주고 받는다. 예컨대, 납작해진 방울 옆 웅크린 사람 모양이 스케일을 유난히 강조됐던 것처럼, 김대환은 《쉬운 길》에서 하나의 몰드로 떠낸 사람 모양이 웅크려 자기의 품으로 쏙 안기는 강아지의 한쪽 윤곽과 만난다는 사실에서, 스케일에 관한 수수께끼를 설계했다. “김대환”과 “양말”의 스케일을 전복시켜, 거대해진 양말의 웅크린 몸이 전시공간의 건축적 요소와 결합한 조각처럼 동선을 해체했다가 다시 재구성하는 면모를 보일 때, 한없이 작아진 사람 모양의 조각은 스케일 탓에 형체를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려운 양말의 한쪽 윤곽과 만나 보이지 않는 윤곽의 실체를 기억하며 암시한다.

   김대환은 오래전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주제를 계속해서 바닥에 굴려, 그것이 자신을 끌고 가게 했다. 이때, 자신과 방울 사이에서 일어난 우연한 일, 그것을 하나의 단서 삼아 조형적 관계에 대입시킨 셈이다. 전시 제목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예언대회상’ 부조 연작은, 이번 전시에서 <더러운 발>(2024), <양양 손>(2024), <깨끗한 손>(2023), <다음 손>(2024)으로 구성됐다.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 연작과 마찬가지로, 이 제목들은 불완전한 기호, 은폐된 기호로서, 상대적인 관계를 구축할 때 닮음과 다름의 의미가 시각화 된다. 제작 시기 상 <깨끗한 손>에서 시작했을 이 일시적인 상호 관계는, <더러운 발>로 이어질 듯 하다가 <다음 손>과도 자석처럼 맞붙는다. <양양 손>은 숫자를 포함한 영문표기 “Four hands”로 인해 좀 더 명확한 이미지를 떠올려주지만, 대체 네 개의 손은 무엇인가? 더러운 발? 깨끗한 손? 다음 손? 하지만, 이 기호들을 벗어나 실제 전시라는 노출된 동선 안에서 마주하는 네 개의 부조 연작은, 평면 사각형 안에 부여된 시공간의 비선형적 층위와 스케일의 전복과 닮음 및 다름의 이중적 모순을 반복하면서, 주머니 속의 방울처럼, 전시 공간 속에 진입한 하나의 신체[나]를 데굴데굴 굴려 여기저기 끼워 놓는다.

   김대환의 《예언대회상》은 전시에 관한 우화 같다. 그는 두번째 개인전 《안녕 휴먼?》(2019)에서 “친구”, “양말”, “만두” 같은 모티프를 가져와 전시에 관한 동선을 고민하고 있었다. 기억과 기대를 넘나들면서, 레제의 소설 속 화자처럼, 그는 전시와 대면할 휴먼 스케일을 시각화 하려 했던 모양이다.

   전시 동선에 관한 이야기는, 조각적 형태들 사이에 깊이 새겨진 인류의 발자국까지 소환한다. <의 아파렌시스A>(2024)는 지금까지의 정황 상 어떤 네거티브 흔적을 기록한 몰드임에 분명한데, 아파렌시스라는 고인류의 발자국 화석을 연상시키면서, 인간의 신체 형상에 기인한 “보기”의 테두리, 그것을 우리의 발 아래 두고, 그것의 거짓과 오류 등을 비약적으로 사유하게 한다.

 

 

[1] 글의 제목은 나탈리 레제의 『전시(L’Exposition)』(서울: 봄날의책, 2024)에서 인용했으며, 본문의 이탤릭체도 같은 책에서 발췌했다.

[2] 레제의 책 제목 ‘L’Exposition’는 한국어판에서 ‘전시’로 번역되었는데, 사진에서는 ‘노출’의 뜻을 갖고 있어 이 책의 주제가 아우르는 중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를 참고해, 레제의 소설에서 다루는 사진과 전시-기록의 관계를 김대환의 조각-드로잉-영상 작업과 전시라는 시‧공간에 접근하는 방식에 투영해 보려는 것이다. 함께 언급된 「전시글」은 《예언대회상》 전시를 위해 작가가 직접 쓴 한 페이지 분량의 글이다.

[3] 이 실패의 경험은 「전시글」에 끼워 넣은 인용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한번은 수업 발표를 위해 강의실 한 켠에 이런 저런 설치를 해두었는데, 순서를 기다리던 중, 청소를 하시는 분께서 모조리 치워 버리셨어요. 차례가 되었을 때에는 빈 바닥 밖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제가 대신해서 마찰 없이 속 빈 소리만 잔뜩 뱉어 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4] 《예언대회상》 전시도면에는 세 개의 작품 제목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중 3. ‘방울이의 거짓된 바닥’ 시리즈는 가)부터 하)까지 총 열 네 점의 개별 작업으로 분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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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hwan G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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